2008/02/18 22:13
나는 지갑이다2008 008 BOOK  10점

지갑을 의인화하여 대신 살인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독자의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아이템이었다.
주인의 심리를 대신 묘사하여 주고 더 나아가서는 살인사건에
휘말린 주인을 걱정하기까지 해 주는 지갑은 재미있는 화자이다.
형사, 공갈꾼, 소년, 탐정, 목격자, 죽은이, 옛 친구, 증인, 부하
...의 긴 여정을 거쳐 이 책은 범인의 지갑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추리 소설은 용의자중에
누군가가 범인이고, 그 트릭을 밝혀내는 게 보통 아니었던가?
(긴다이치 소년의 사건부를 너무 많이 보았나보다-_-a긁적)
이러한 나의 선입견탓인지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졌을 때에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용의선상에 있지도 않던, 그보다 범인의 지갑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 범인이라니!
책을 읽는 내내 범인이 쓰카다 가즈히코일까 아니면 모리모토 노리코일까 나름 머리를 굴리며
추리를 해보려 했던 나의 의지에 물을 끼얹는 결말이었던지라 조금은 실망이었다.

그래도 일그러진 인간의 욕망, 차라리 돈을 향한 욕망이 더 순수해보이지 않을까 싶을만치
추악했던 그 욕망을 잘 표현했다. 처음에는 그저 보험금을 노린 살인사건이라 여겼는데,
알고보니 가즈히코와 노리코 양쪽 모두 물질적으로 아쉬운 것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원했던 것은 오로지 유명세였다.
남의 눈에 띄고 싶고 돋보이고 싶은 그런 욕망은 사실 많던적던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것이겠지만, 이를 위해 잔인했던 일련의 살인사건들을 일으킨
그들의 욕망은 그저 무서울 따름이다.

모방범을 읽고 난 뒤에 읽었더니 아무래도 두 작품을 자꾸 머릿속에서 비교하게 된다.
모방범은 무려 560페이지에 달하는 사전 수준의 두께에 3권으로 완결되는 장편소설이지만
추리 소설을 접해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추천할 만큼 내 인생 최고로 치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왠지 모방범을 한 번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모방범』이 강력한 포스의 명작이었기 때문이지,
결코 이 책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나는 지갑이다』가 작년 여름에 발행된지라
미야베 미유키씨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신작이 더 별로네'라는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이 책은 그녀의 초기작품이었다. (죄송죄송)
그래서 읽는 내내 모방범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걸까.
난 '나는 지갑이다'를 읽으며 모방범의 초석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PS. 원제를 한국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오히려 원제만도 못해보이는 느낌의 제목들이 많은데
      이번만큼은 한국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일본판 원제는 長い長い殺人 (길고 긴 살인)
      나는 지갑이다는 추리소설이지만 나름(?) 명랑한 느낌이 들고
      반대로 일본판은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  
http://danha.ivyro.net2008-02-18T13:13:02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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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댕